에세이처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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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만드는 명함 - 5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24
13. 작은 원고료, 큰 용기평생 남의 기획서를 쓰고 자료만 정리해왔는데, 어느 날 지역 커뮤니티지에 내 글이 실렸다. 원고료로 받은 소정의 상품권보다 더 값진 건, 내 이름 아래 실린 글 한 줄이었다.누군가 내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는 사실이 그렇게 큰 위로일 줄 몰랐다.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마주했다. 작은 시작이지만, 그 용기가 나를 앞으로 이끌어줄 것 같았다. 14. 이웃과 함께 여는 프리마켓토요일 아침, 동네 작은 공터에서 열린 프리마켓에 참가했다. 내가 만든 캔들과 조그만 손수건을 접어 늘어놓았다. 처음엔 좀 쑥스러웠지만, 이웃분들이 하나둘 웃으며 다가오셨다. “직접 만드셨어요?” “이 향 너무 좋네요.” 그런 말 한마디가 어찌나 힘이 되던지.젊은 시절엔 회사 이름 뒤에 숨어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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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만드는 명함 - 4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22
10. 반려식물과의 대화처음 키우는 식물 앞에서 엉뚱하게도 말을 걸었다. “너도 물이 너무 많으면 숨 막히겠지?”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, 창가에 두고, 이름도 붙였다—초록이. 말이 없지만, 하루가 다르게 잎을 펼치는 초록이를 보며 무언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.사람과의 대화보다 식물과의 침묵이 좋을 때도 있다. 반려식물이란 말이 참 마음에 든다. 함께 살아가는 생명, 그러니까 나도 돌보이고 있다는 증거. 초록이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초록빛 마음을 가지게 되는 듯하다. 11. 벚꽃길 혼자 걷기 도전기봄날, 집 근처 하천가에 벚꽃이 만개했다. 예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아름다움을 흘려보냈는데, 올해는 혼자 그 길을 걷기로 했다. 셀카 하나 없이, 느릿느릿 천천히.꽃잎이 바람 따라 흩날릴 때, 내 마음도 가볍게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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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만드는 명함 - 3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21
7. 혼자 간 극장에서 울다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였지만, 아무도 없는 낮 극장에 혼자 앉아 봤다. 어쩌면 눈치 보지 않고 울고 싶었던지도 모른다. 주인공이 조용히 무너질 때,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.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음껏 울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치유가 될 줄 몰랐다. 퇴직 후 꾹 눌러뒀던 감정이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갔다. 집으로 돌아가는 길, 눈가는 퉁퉁 부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. 8. 딸아이의 문장에 울컥하다“엄마, 요즘 얼굴 좋아졌어.” 딸아이가 툭 던진 말이 마음을 흔든다. 퇴직한 날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딸이, 이제는 내가 웃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.그날 밤, 딸이 보내준 카톡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. “엄마, 이제 엄마 인생 살아도 돼.” 말끝이 울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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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만드는 명함 - 2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20
4. 시장 골목의 위로우울한 기분을 털어보려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.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통 옆에서 떡집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는다. “그 얼굴 보니 좋다, 아가씨.” 그 한마디에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졌다.일을 하면서는 이웃과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바빴던 내가, 이제는 물건보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. 장바구니 속에는 계절 과일이 가득하고, 마음속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남았다.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이런 정겨움이 숨어 있었다는 걸, 이제야 알아가는 중이다. 5. 내가 만든 첫 김밥 도시락집에 있자니 손이 근질거려 부엌으로 향했다. 김밥 재료를 하나하나 다듬으며 칼질을 하는데, 묘하게 집중이 된다. ‘칼날은 조심, 밥은 꼭꼭 눌러야 터지지 않아.’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.아침 산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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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만드는 명함 - 1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19
1. 퇴직 통보를 받은 날“정말 죄송합니다. 부서 조정으로 인해...”팀장의 말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.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. 스물아홉에 입사해 서른여섯에 팀장이 되었고,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25년이었다. 숫자처럼 정확했고, 버릇처럼 성실했다. 그런데 53세의 나는, 사무실 복사기 앞에서 종잇장 한 장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.퇴직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, 익숙한 지하철역이 낯설게 느껴졌다. 퇴근길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흘러갔고, 나만 멈춰선 기분이었다. “이제 뭘 해야 하지?”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.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, 그 순간 내 마음엔 다만 공허함만 가득 찼다. 2. 명함이 사라진 자리문득, 서랍 속 깊은 곳에서 명함함이 눈에 들어왔다..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