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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다시 만드는 명함 - 1
    하루치지혜 2025. 6. 25. 11:19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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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1. 퇴직 통보를 받은 날

    “정말 죄송합니다. 부서 조정으로 인해...”

    팀장의 말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.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. 스물아홉에 입사해 서른여섯에 팀장이 되었고,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25년이었다. 숫자처럼 정확했고, 버릇처럼 성실했다. 그런데 53세의 나는, 사무실 복사기 앞에서 종잇장 한 장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.

    퇴직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, 익숙한 지하철역이 낯설게 느껴졌다. 퇴근길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흘러갔고, 나만 멈춰선 기분이었다. “이제 뭘 해야 하지?”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.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, 그 순간 내 마음엔 다만 공허함만 가득 찼다.

     

     

    2. 명함이 사라진 자리

    문득, 서랍 속 깊은 곳에서 명함함이 눈에 들어왔다. 누렇게 빛바랜 종이들—내 이름, 직책, 연락처가 정갈하게 인쇄된 것들. 하루에도 수십 장씩 건네며 "○○○입니다"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. 그 한 장의 종이가 나를 설명해주었고, 누군가와 대화할 명분이 되기도 했다.

    그런데 지금, 나는 더 이상 명함이 없다. 누군가 “지금은 어떤 일 하세요?”라고 물어오면 멈칫한다. 회사 이름도, 직함도 말할 수 없다. 마치 존재의 일부분이 사라진 듯 허전하다. 그동안 나는 '회사 속 나'로 살아왔구나—그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.

    하지만 동시에 한 줄기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. 더 이상 타이틀 뒤에 숨지 않아도 되는 시기. 이제부터는 '무엇을 하는 사람'이 아닌, '어떤 사람'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 명함이 없어진 자리, 거기서부터 진짜 나를 시작해 보려 한다.

     

    3. 아침 7시의 거실

    퇴직 후 맞이한 첫 월요일. 알람 없이 눈을 뜨니 시계는 정확히 오전 7시를 가리킨다.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몸이 반응하는 게 익숙하면서도 씁쓸하다. 창문을 열자 아직 덜 깨어난 골목이 보이고, 그 위로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는다.

    출근하던 시간, 비워진 거실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신다. 이 넓은 시간이 이제 내 것이지만, 어쩐지 불편하다. 내 삶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서.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. 그렇게 나와의 첫 하루를 조심스레 시작해본다.

     

     

    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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